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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불린 “봉오동전투” 그날의 이야기

작성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 승인 2019.08.01  22: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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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들은 누구나 봉오동·청산리전투를 알고 있다. 우리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일본정규군을 상대로 대패를 안겼으나 독립군의 피해는 적었다고 알려진 자랑스러운 항일 무장독립전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봉오동전투라고 부르는가? 봉오동은 어디인가? 그저 막연하게 국내 어느 동네의 지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만주 북간도지역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막연하게 넓고 황량한 만주벌판 어디쯤 우리 독립군 몇몇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훈련을 하다 근처 산에 올라 매복전을 벌였으리라 이해하기도 한다.

만주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을 신화처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서간도와 북간도를 구분하지 못한다. 압록강 건너 서간도는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들인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선생의 일가가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국권회복을 위해 무장투쟁의 길을 선택하고 국내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만주 서간도의 유하현에 경학사를 세우고 동포들과 새 삶터를 개척한 것이다. 같은 시기 북간도 지역은 주민의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북간도는 이미 동포사회가 잘 형상되어 있으니 그분들은 서간도 지역에 새로운 신한촌을 건설해 동북쪽과 서쪽 모두에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겠다는 의지였을 것이다. 

봉오동은 함경북도 온성지역에서 두만강을 건너가면 바로 마주치는 곳으로 강폭이 좁은 곳은 헤엄을 못 치는 사람도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과 다리로 연결된 국경도시 도문에서 가까워 걸어가도 30분이면 봉오동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봉오동은 원래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산골이었다. 1909년 도시인 연길에서 살던 최운산 장군 일가는 큰 뜻을 품고 황무지였던 그곳으로 이주해 동포들을 불러들여 마을을 이루고 봉오동으로 이름붙인 곳이다. 한자로 봉황鳳오동나무梧고을洞, 조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 인류애를 담아 영원한 이상향을 꿈꾼 곳이다. 청년시절 최운산은 왕청현 총대(총판)로 일했고, 중국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북간도의 황무지를 주민들에게 저렴하게 불하하는 시기에 그 일을 직접 담당했다. 자신의 명의로 봉오동을 비롯한 왕청, 석현, 안산, 도문, 서대파, 십리평, 양수천자 등 봉오동 주위의 넓은 땅을 헐값에 구입했는데 이후 여러 지역이 도시로 발전하면서 자산가가 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로 계곡 사이로 맑은 강이 흐르는 풍수지리가 좋은 봉오동이 가족들이 함께 살아갈 마을터로 선택되었다. 봉오동은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신한촌으로 발전하였다. 1912년 당시 동북삼성지역의 지배세력인 장작림에게 허락을 받아 비적들로부터 조선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00여명의 병사들로 구성된 무장 자위대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최운산 장군은 간도로 들어오는 애국청년들을 모두 독립군으로 훈련 양성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군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1915년 봉오동 산중턱을 개간해 연병장을 만들고 벌목한 나무로 막사를 지어 그들을 모두 수용했다. 독립군 본부인 저택을 중심으로 3000평 규모 토성을 쌓고 동서남북 사방에 포대를 구축하고 대포를 설치했다. 봉오동이 대규모 무장독립군기지로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운산장군과 형제들은 즉시 사병부대였던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했다. 당시 병사는 670여 명이었다. 

3.1운동 이후 간도로 넘어오는 애국청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만주지역의 모든 독립군부대가 새로운 부대원을 맞아들였던 시기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새로운 독립군들을 훈련하고 분산해서 주둔시켜야 했다. 최운산 장군은 조직력이 있는 서일총재와 함께 자신의 소유지인 서대파를 주둔지로 내어주고 군자금을 제공해 북로군정서 창설을 주도했다. 또한 서대파에서 멀지 않은 십리평에 새로 들어온 병사들을 훈련할 단기 군사학교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군사학교의 운영을 북로군정서에 맡기고 김좌진을 사관연성소 소장으로 임명했다.

1920년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을 독려하며 '독립전쟁 원년의 해'를 선포했다. 일본군과 전쟁을 하려면 대군단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 최운산은 무기와 식량과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책임질 것을 약조하고 북간도의 모든 독립군을 봉오동으로 불러들여 대통합을 이루었다. 통합군단 부대명은 <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였다. 북로독군부장 최진동 이하 홍범도, 김좌진을 비롯해 안무, 서일, 김약연, 구춘선, 박영, 오하묵 등등 당시의 북간도의 독립군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단일 세력을 이룬 것이다. 그 전투력의 중심에 오래된 정예부대 <大韓軍務都督府대한군무도독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곡물상과 축산업으로 이미 러시아와 장기간 무역 거래를 하고 있었고, 가까운 연해주의 독립군들과도 관계가 깊었던 최운산 장군은 지속적으로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1920년 사이 급작스럽게 늘어난 독립군들을 모두 무장시키기 위해서는 한꺼번에 많은 무기를 구해야 했다. 무기공급처와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그때 마침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체코군단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무기가 필요 없어진 그들로부터 무기를 살 수 있었다. 대규모 토지와 목장을 소유하고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양조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던 간도 제1의 거부였던 최운산은 독립전쟁이 한 고비를 넘어갈 때마다 자신의 재산을 줄여가며 군자금을 마련했다. 1920년 1월 5만원에 팔았던 석현의 토지는 지금도 석현지역의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는 제지공장 터다. 

▲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난세의 영웅> 방송화면

만주 봉오동에서 대통합을 이룬 통합군단 <大韓北路督軍府>군은 소극적으로 훈련만 하며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국내와 가까운 만주를 근거지로 삼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며 국내의 애국 세력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다. 또한 점점 늘어나는 막대한 군자금을 감당하기 위해 모연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봉오동에 모인 대군단의 운영자금을 책임졌던 최운산은 만주를 넘어 국내 모연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힘썼다. 곳곳에 설립된 대한군무도독부의 지방국은 군자금 모집활동과 독립군이 되기 위해 간도로 넘어가는 청년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3·1운동 이후 군자금과 장병 모집, 무기·식량·의복 등 군장비 수집, 사관 양성, 병영 건설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본격적인 국내진공전을 위한 이러한 무장역량의 축적은 병참기지와 부대의 건설과 소전투에서의 축적된 승리를 통한 조직력의 확대를 추구할 수 있었다.”(「朝鮮獨立運動史上における1920年10月-靑山里戰鬪の歷史的意味を求めて」 金靜美, 『朝鮮民族運動史硏究』 3, 朝鮮民族運動史硏究會, 1986, 111쪽.)

"만주지역의 항일독립군단체들은 3·1운동 이후 축적된 무장력을 바탕으로 1920년에 들어와서 활발한 국내진공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상해의 『독립신문』은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의 기습대와 전령대가 협동하야 도강하여 벌인 소전투가 총 32회에 달했고, 일본 순경대정탐을 격살하고 일본관서와 순사파출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관헌은 북간도의 독립군단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무력침격을 감행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는 최명록부대(군무도독부)가 1920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무려 36회에 걸쳐 국경의 종성군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했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49권』「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반병률, 2009; 미촌수수·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8, 708쪽. 

▲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난세의 영웅> 방송화면

그렇게 여러 독립군들이 힘을 합쳐 대규모로 결집하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는 등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자 "만주의 독립군들이 봉오동에서 세를 불리고 있다.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으니 독립군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토벌해야 한다"는 일제 밀정의 보고서가 이어졌다. 일본군은 드디어 무장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향한 출병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첩보를 통해 일본군의 습격 계획을 미리 입수한 최운산은 <대한북로독군부>지휘부와 함께 한 달 전부터 마을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부대원을 전투편대로 재편해 연대별로 산 위에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총사령관 최진동과 지휘부는 최고봉인 봉초봉에 자리 잡고, 김좌진이 이끄는 1연대는 초모정자산에, 홍범동의 2연대는 남봉오산 정상에, 3연대인 오하묵 부대는 예비부대로 봉초봉 뒤편인 장골에 주둔했다.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세 개의 산 위에 자리 잡은 각 부대는 길이 잘 보이는 곳에 참호를 깊게 파고 매복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병력이 많아 보이도록 눈에 잘 띄는 산위에 군복을 입힌 허수아비를 세워두었다. 최운산 장군은 당시 미싱 8대를 마련해 모든 독립군의 군복을 지어 입혔다. <대한북로독군부>는 보급부대와 의무부대를 따로 편성할 만큼 철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 

▲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난세의 영웅> 방송화면

높은 토성으로 둘러싸인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는 총사령관인 부장 최진동이 서명한 통행증 없이는 출입할 수 없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에서 전체 군단을 이끌고 있는 <대한군무도독부>는 1912년부터 봉오동에서 동고동락한 정예부대라 밀정의 잠입이 불가능했다. 독립군의 실체를 전혀 알아내지 못한 밀정들은 봉오동 주변으로 독립군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위험하다는 정도의 보고서만 보냈을 뿐이다. 봉오동으로 습격해 들어오면서도 일본군은 우리 군대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독립 열기에 숫자만 늘었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민병대 수준일 거라 짐작했다.

1920년 6월 7일 밤새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은 새벽 3시반경 안산에서 한 차례 전투를 치르고 새벽 6시 30분경 고려령 서편 1,500m고지에 도달했다. 봉오동을 향해 전위부대를 내보냈으나 매복해서 기다리던 독립군 전위대가 일본군 전위부대를 전멸시키고 재빠르게 본대로 복귀했다. 전위부대원들을 모두 잃은 일본군은 잠시 퇴각했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해 고려령을 넘었고, 11시 30분경 일본군 보병부대 본진이 봉오동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산 위에 매복한 독립군들은 잠복부동한 채로 그들이 산으로 모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봉오동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이 대피하면서 중요 가재도구까지 치운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을을 수색하던 일본군은 비어있는 최운산 장군의 집에서 마굿간에 묶여있던 말 몇 마리를 발견했다. 한 마리는 일본군 대장이 올라타고 나머지는 대포와 기관총 등 무거운 무기수레를 끌고 산을 넘느라 지친 일본군부대의 말들과 바꿔 무기수레를 지워 산으로 끌고 갔다. 당시 어린애였지만 담대한 성격의 최운산 장군의 큰딸 청옥은 몰래 숨어서 일본군을 보았다고 한다. 어깨에 견장을 붙이고 긴 장화를 신은 일본군들이 번쩍거리는 나팔을 요란하게 불며 마을을 지나 산으로 행진했다.

산으로 올라온 일본군의 후미가 매복지점을 지날 무렵 봉초봉 독립수 아래에 서있던 사령관 최진동 장군이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발사했고 동시에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완전 포위된 일본군은 혼란에 빠졌다. 더구나 마굿간에서 탈취해간 말들이 총소리에 높이 뛰어올랐다. 말을 뺏아 탔던 일본군 장교는 말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다. 무기수레를 끌고 간 말 한마리는 기관총과 대포를 실은 채 거꾸로 내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난세의 영웅> 방송화면

본격적인 총격전이 계속 되었다.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홍범도 장군이 자신의 휘하 부대원들에게 퇴각하라는 어이없는 명령을 내렸다.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의 퇴각 명령이 없었음에도 그는 살아남아 조국의 독립을 보자며 스스로를 정식 군인이 아닌 빨치산이라 칭하고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올라 뒤로 퇴각했다. 다음은 그때 홍범도 부대원이었던 이종학의 글이다. 

“그날 아침.... 望塔은 봉오골 가은産 맨 마지막 3골 어구 가운데 峰에 있었다. 일본 군대는 일시에 자우방면에서 침입하여서 望坮를 향하고 突入하여 우리 望坮있는 데다가 사격을 시작하였다. 우리도 마주 사격을 始作하였다. 잠시 후에 洪범도 大장은 사격을 그치고 북쪽을 향하여 차츰 높은 봉으로 오르라는 命令을 전하였다.... (중략) .... 홍범도장군은 ”우리는 죽지 아니하고 독립을 해야 된다.”고.... 우리는 정식 군대가 아니고 빨치산이다. 그러니 전략과 전술이 정식 군대와 빨치산이 판이한 것이다.”라고 흥분에 겨우신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回想記(俄領과 中領에서 進行되던 朝鮮民族解放運動)」 中 홍범도군대 李宗學의 回想記. 1958년) 

그런데 그들과 함께 있던 신민단 대원들은 본부의 퇴각 명령이 없었으니 홍범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며 그 자리를 사수했다. 그러나 숫적 열세에 밀린 그들은 일본군의 집중 공격에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삼면을 포위하고 승세를 굳혀가던 중에 한쪽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아군이 치명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봉초봉에서 이 사태를 파악한 최운산 장군이 매복을 풀고 부하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전투를 이어갔다. 전투에서 매복전과 백병전은 어려움을 비교할 수조차 없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고 자칫 아군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 주먹만 한 우박이 떨어지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고 전열을 정비한 최운산 장군이 위기를 넘겨 승세를 굳힐 수 있었다.

자연 조건이 나쁠 때는 그곳의 지리에 밝은 지역군대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비가 오는 중에 일본군 후속부대가 도착했고 다른 방향에서 산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군 후속부대는 독립군을 속이기 위해 군모에 두른 붉은 띠를 떼어내고 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 일본군들은 멀리서 들어오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해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일본군의 사상자가 대규모로 늘어났다. 전투 후 일본군의 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지만 당시 봉오동에서는 일본군끼리의 치열한 사격전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수백에 이른 이유 중 하나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일본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두만강을 건너 유원진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독립신문은 전투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여 명, 독립군 측의 사망은 1명, 부상자 2명이었다.”(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자.) 라고 독립군의 승전보를 전했으나 당시 일본군은 사망자만 500여 명이었고 중상자도 수백에 이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아군인 독립군의 사망자도 수십 명에 달하였다. 

전투 후 일본군의 ‘전투상보’는 자신들이 상대한 독립군에 대해 “적은 전부 러시아식 소총을 갖고 탄약도 상당히 휴대하였으며 사격도 상당히 훈련되어 있다. 거리 측량이 불확실한 7~8백미터 거리에서도 사격을 하며 지형을 이용해서 방어할 때는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또 용감하게 싸운다.” ....(중략).... “금회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였다. 대안불령선인단은 정식의 군복을 사용하고 그 임명 등에 사령을 쓰며 예식을 제정하고 있는 등 전적으로 통일된 군대조직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나측은 이를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제 경고를 줄 필요가 있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 578~579, 614쪽.독립군의 전투력에 놀라고 감탄하면서 독립군의 활동을 보장하는 중국 측에 대한 불만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개별 전투상황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대한북로독군부>의 지휘부나 전체 운용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자신들이 누구와 싸웠는지 그 부대의 지휘관은 누구인지 등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고 “북로독군부(전 명칭 대한군무도독부) 제1, 제2중대(수령 최명록), 대한독립 신민단(김규면), 독립의군(홍범도)에 속하는 것으로서 지휘관은 불명”(安川追擊隊, 봉오동부근전투상보) 이라고 기록했다.

본 정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최운산 장군은 소, 돼지를 잡아 축하잔치를 벌이고 각 부대별로 기념촬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치열했던 봉오동전투를 실제 촬영한 사진을 임시정부로 보내 국내외에 알리라고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별지 전쟁 촬영 사진 3매는 제2남 지방의 박준재(朴準載) 씨가 전쟁 당시 실시 전황을 보고 촬영한 것이다. 이것은 임시정부로 보내서 석판으로 인쇄하여 세계에 선전하려는 것인데 보신 뒤에 반송하기를 바람.” ([국민회통달문] 기안(起案) 최완(崔完) 교열 결제 번호 104 건명:‘전쟁 촬영의 건’ 발송인:회장. 기안 발송 연월일 : 대한민국 2년 7월 20일 독군부 최진동) 그러나 아쉽게도 <대한북로독군부>로 다시 돌려보내라는 요청을 할 만큼 소중하게 생각한 이 사진은 그 후 누가 어디에 보관했는지 오늘날 전해지지 않았다. 

봉오동전투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부대는 의무부대, 보급부대 등이 기본 편제에 포함 되어 수송과 보급, 의료지원 등 병사들의 생활과 안전에도 소홀함이 없는 관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독립군 부대들이 서로 주고받은 전통문에 의하면 봉오동전투에서 부상당한 독립군 병사들을 치료할 의사를 보내달라는 요청문이 있다. 최운산 장군의 처 김성녀여사는 당시 사망자가 수십 명이었고 부상자도 많았다고 했다. 다음은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총상을 치료할 의료진이 부족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문서의 내용이다.

"[의사 천거에 관한 조회의 건] - 지금 더위가 점차 박도하와 질병 발생이 심하여 지는데(부상자는 봉오동전쟁) 부상자는 아직 치료가 되지 못하여 진실로 우려하는 바이오며, 용정 제창병원의 의사 구정서(具正書)씨를 천거하고 또 ○씨의 소개에 의하여 수삼 명의 의사를 권유 입송하시기를 바라오며 작일에도 부상자로부터 재촉이 있는 실정이오매 되도록 구씨에게 소개된 몇 명을 대동하고 내임하시기를 요망합니다. ([군무국장 조회문] 군무발 제77호 수(受) 국민수 제157호, 민국 2년 7월 9일, 대한민국 2년 7월 6일 독군부 군무국장 이원(李園) 대한국민회장 구춘선 귀하 )

<대한북로독군부> 지휘부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 전투 전반에 대한 평가회를 가지고 일본군의 무기 등 노획물과 일본군 사상자의 숫자 등을 보고받고 아군의 손실과 전과를 살폈다. 당시 아군이 노획한 물자는 “대포 4문, 기관총 수십정, 장총 5백여정, 탄환 수만발에 수류탄 다수에 이르렀고 적군 射殺 500여 명, 중상자 700여 명, 경상자 1,000여 명”이다. 이 숫자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밝히고 있는 일본군 피해 규모보다 훨씬 많다. 김성녀 여사는 전투 현장의 모든 것을 평가한 후 집계했던 회의에서 밝힌 봉오동전투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며 향후 학자들이 사료를 찾아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길 당부했다.

또한 그 회의에서 총사령관인 최진동은 지휘관인 홍범도가 전투 중에 제대로 응전을 하지 않고 퇴각하여 아군에 치명적 손실을 입힌 것에 대해 크게 문책했다. 그내용은 1920년 8월 28일 작성한 <주 간도 총영사 대리영사 사카이 요사키치(堺與三吉) 보고서> (수신자: 외무대신 자작 우치다 고오사이內田康哉, 전보 송부처: 공사 지부, 봉천, 길림, 조선총독)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주백도 “봉오동전투가 끝난 후 홍범도부대가 일제에 아무런 응전을 하지 않은 채 급속히 퇴각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본 대한북로독군부의 최명록 부장이 홍범도를 비판했다."(신주백, 『1920-30년대 중국지역 민족운동사』p33, 선인. 2005.) 고 그 내용을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최진동 장군은 지휘관이 전투 중에 자신의 부대원들을 데리고 전투 현장을 피해 도주한 것은 항명죄에 해당하며 이는 즉결처분에 해당하는 중죄임을 이야기하며 엄벌하려 하였으나 최운산 장군이 홍범도 장군의 판단에 오류가 있으나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를 청하며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 mbc 놀라운 tv 서프라이즈 <난세의 영웅> 방송화면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대한북로독군부>는 전후 체제를 재정비하고 일본군의 반격에 대비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며 향후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는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고 안무의 국민회군이 정비된 독립군이였지만 정규군인 일군과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670명의 강력하고 완전무장한 최진동장군의 군무도독부와의 통합은 1,200여명에 이르는 단합된 무장력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립군이 결성됨으로하여 봉오동전투의 승리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 윤병석 등. 한국일보사, 1집) 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는 당시 다수의 독립군 단체들이 무기도 부족했고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던 상황을 지적하면서 <대한군무도독부>가 무장독립군의 중심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최운산 장군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어놓고 대한민국의 첫 군대인 <대한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간도의 독립군부대 전체를 통합해 <대한북로독군부>라는 대군단을 이루어 내지 못했다면 만주에서의 무장 투쟁은 개별 빨치산부대의 소규모 게릴라 활동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간도 무장독립전쟁에 대한 올바른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다.

최운산 형제들과 이름 없이 산화한 모든 독립군이 함께 이룬 봉오동에서 일치와 헌신이 더욱 그립고 절실한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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