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고 박종태 님의 사연 ( 필명 김 자현)

 

 유족 박홍수 님의  부모님, 고 박종태 선생과 고 이옥순 여사
 유족 박홍수 님의  부모님, 고 박종태 선생과 고 이옥순 여사

박종태의 꿈 !

 

대한 독립 만세, 광복이다 해방이다

버선발에 마고자 흰 적삼이 춤추는구나

석삼년 중풍 든 노인부터 꼬맹이까지 들녘마다 마을마다

부뚜막도 들썩이고 당산나무 외장 치네

해방의 날 왔다고, 사람이라 생긴 사람 모두 나와 대한 독립 만만세로다

환희의 물결물결 가시기도 전

준비되지 않은 시대의 해방공간에 세 갈래 네 갈래

선각이란 사람들 두루마기 자락 광복의 뒤 그늘 짙게 드리우고

큰 혓바닥 작은 혓바닥

독사의 혓바닥 한반도에 펄떡이며 널름거릴 때

머나먼 바닷길 따라 들어온 하이에나들

반만년에 빛나는 선한 나라 땅

일제가 거덜 낸 조선반도에 유린하는 자들 또 나타났으니

눈알 시퍼런 놈들이 먹거리 찾아 헤매는구나

 

제주도민, 무슨 죄로 그들에게 발포하랴

제국주의 완수하러 상륙한 양키 총부리 앞에

대표 짐승 이승만 네발로 기며 우리 백성 수백만 살육하고 말았네

무고한 도민 학살 단호히 거부한다!

외세는 즉각 퇴진하라!

토지는 짓는 자가 주인이다 무상 분배하라!

조선경비 사령부 여수 14연대, 애국민에게 호외를 돌리며 호소할 때

발맞추어 나가자던 박종태의 꿈!

전남 영광 군남면 포천리를 빛낼 인재 박종태를 내놓으시오

내 아버지에게 내린 죄명 무엇이오

광주 이씨 이옥순의 남편 박종태를 내놓으시오

당시 아들 박홍수는 코흘리개 6살, 재판은 열렸소 재판을 열었소

연행은 49년 3월 4일 영광 지서에서 사살은 3월 5일

살해 명령자 누구요 발포 한 자 누구요

자신이 지은 양심의 감옥에서 영혼을 썩히지 말고

지금이라도 밀고자는 고백하고 광명 찾아라!

 

가을의 불꽃 같은 영광도

계절을 물들이는 금수강산의 꽃 잔치도 자연의 현상이라 함부로 말하지 말라

밭떼기 있는 자는 콩 보리 심고 쌀밭 있는 사람 모내기할 때

서로서로 바꿔 먹고

새참이 들고 나며 품앗이도 하여갈 때

전 답 없는 사람 모두 모이소

철거덕철커덕- 마을마다 동구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

박종태가 일본에서 들고 온 기계

양말 짜고 옷감 짜고 편물 하는 소리

철커덕철커덕- 송곳 꽂을 땅조차 없는 사람 공장에서 일합시다

오로지 내 조국 결국은 우리 민족

너도 먹고살 만하고 나도 먹고살 만하고

우리 모두 보릿고개 없는 세상 만들어 볼라네

박종태가 펼쳐 보일 대동 세상 여태 아니 오고

무슨 죄명으로 죽였소 똑똑하여 죽였소 애국할까 봐 죽였소!!

한강의 기적이 거저 온 줄 아시오

박종태가 펼쳐 보일 평생의 영화가 철커덕철커덕-

자주국방 하자고 지금도 지하에서 박종태가 돌리는 기계 소리

자주독립 하자고 인민을 일깨우는 박종태의 경종

천지간에 울려대니 역사에 새겨질 이름이로다

그런데 그런데...

죽여도 좋은 사람? 빨갱이란 두건을 누가 씌웠소!

 

고 박종태 님은 박홍수 님의 부친으로 당시 25세로 모친과는 동갑이셨다. 고향은 전남 영광 군 군남면 포천리이다. 광주에 있는 고교 <숭의 학교> 졸업 후 일본에 있는 명치 대학으로 진학하셨다. 2년 재학 중 양말 짜는 기계 2대를 갖고 잠시 귀국하셨지만 나라 되어가는 꼴이 하 수상하여 공부를 마저 하러 떠나지 못했다.

여수에 사는 친구, 고교 동문 들과 합류하여 진보적인 활동을 벌이던 중 여순 항쟁에 연루되신다. 이후 여순사건 당시 살아남은 친구들이 영광 불갑산에 몸을 숨기고 기거하던 중 당시 박종태 님을 찾아오기도 하고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를 의논하고 거꾸로 가고 있는 나라 걱정에 밤을 지새기도 했다. 다음 해, 암담한 하늘 밑에도 어김 없이 봄이 찾아왔다.

여순 발발 5개월이 흐른 어느 날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49년 3월 4일 아침이었다. 어떤 연유인지 무조건 연행되셨다. 다음 날 영문도 모르는 유족 6살 박홍수 님은 어머니 등에 업혀 가고 하나뿐인 여동생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이다. 영광 경찰서 군남 지서를 향해 가다가 외숙 두 분이 끌고 오시는 달구지를 맞이했다. 어머니는 마구 우시고 덕석을 떠들어 보자 거기 아버지, 고 박종태 님이 누워계셨다. 총탄에 맞아 여기저기 피가 낭자한 아버지가 보였다. 하염없이 우시는 어머니와 외숙들이 달구지를 끌고 불갑천으로 갔다. 개울가로 가 시신의 핏자국을 씻기던 아침을 무슨 수로 잊을 수 있을까.

앞산에 아버님을 묻고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를 따라가면 아버지 묘소에서 통곡 하시던 어머니! 이옥순 여사는 57세에 돌아가셨다.  광주 이씨 참판공파 후손이신 외조부께서 당시 서당 선생님이셨는데 외손자인 박홍수 님께 늘 말씀하셨다. '떠들 일은 아니로되 네 애비는 정의롭고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을 잊지 말라‘ 고 당부 하셨다 .

  박홍수님의  졸업식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박홍수님의  졸업식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나라의 재목이 될만한 공부한 인재, 버팀목이 될 수 있었던 재력가, 타고나기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건장한 젊은 청춘들이 주 학살 대상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공부할 나이이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세대여서 표적이 되기도 했겠지만 '15세 이상 남자는 다 죽이라' 는 명령이 위에서부터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한반도의 힘과 정기를 모두 빼앗고 이승만과 같은 썩은 정신의 소유자들이 반민특위까지 해체, 역사 청산이 지금까지 일점 일획도 되지 않았으니 오호통재라! 오늘날 투표자의 반이 숭미 친일 골수, 괴질의 정권을 탄생시킨 그 장본인들 아니겠는가.

삼가 어느 구천을 떠돌고 계십니까? 못난 후대가 지금까지 민족적 최우선 과제를 뒤로 한채 방종하며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옵소서! 

분노의 깊은 터널, 처절한 기억의 동굴에 갇혀서 살아오셨을 74년. 남은 유족들이 그 깊은 원한의 우물에서 빠져나오시는데 미미하게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유족 박홍수님,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유족 박홍수님,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 위의 사진은 모두 유족들로부터 제공받았으며 사연은 필자가 직접 취재하여 게재를 허락받았습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김승원 주주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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