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주기에 열어보는 역사의 봉분 - 희생자 고 오형용님 댁 사연

 

                 희생자 부친의 사진은 없고  유족 오치연님의 어린 날 어머니와 함께
                 희생자 부친의 사진은 없고  유족 오치연님의 어린 날 어머니와 함께

 

영혼을 할퀴던 소리!

 

어머니!

어머니의 태 속에서 나는 보았소

가시나요 어머니

이제 가시나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가시나요

저 삽작 밀고

내 사랑 고운 님 보고 싶어

언젠가 살아서 돌아올 거야

눈물 젖은 두만강 푸른 물에- 목 놓아 부르며

기다리고 기다렸건만, 무심한 구름은

그 숱한

어머니 세월을 잡아먹고 십이월 중순 하늘은

새파랗게 침묵일색입니다

 

우루루 우루루

은곡리에 도척들 발자국 소리소리

어머니 자궁 속에서 나는 들었소

마루를 구르는 구둣발 소리

우루루 우루루 벼락치듯 오형용을 잡으러 왔다

총개머리판 몽둥이가 허공을 가를 때

개 패듯 하는구나-  내 작은 아들의 살 터지는 소리

스무 살 신랑의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

외마디 비명 비명에 담벼락이 무너지고

어머니 당신의 애간장 녹아내릴 때

조성면 은곡리 당산나무가 울고, 계절을 타고 넘는

발 묶인 뒷산 억새들의 아우성 아우성

 

어머니 가시나요

50년 한날같이 기다리더니 1백년 못 기다리고 이제 가시나요

죽어서 첫 이레에 건넌다는 삼도천 건너

망각의 강 사공을 만나러 가시나요

굽이굽이 서러운 강 건너

꺼억꺽 탄식의 강 건너, 분노의 강 증오의 강 건너서면

통곡과 눈물이 고여 생긴 망각의 강 나온다지요

 

그 물을 한 사발 마시면 철퍽철퍽

에고에고 내 새끼 살 터지는 소리가 죽고

그 강물 두 사발 들이키면 피 튀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멎고

그물을

세 사발째 마시면

지아비의 비명이 귓전에서 사라진다네요

 

이승의 못 볼 꼴 잊혀지고

실신한 오형용에게 물 퍼붓던 소리도 멎고 나면

하지만 어머니

아아- 그러나 다 잊고 나면 어머니-

억겁의 시간 거슬러 오로지 하나뿐인 당신의 님-

내 아버지를 못 알아보면 어쩐답니까

공주형무소에서 고을로 끌려 나와 공주 어느 다리에서

1950년 6월에 처형당해

무심한 강물에 홀로 어디로 떠내려 가버린

서러운 오형용 못 알아본다면 피 맺힌 그 세월을 어쩐 답니까

 

하지만 그렇거든, 하지만 그렇거든요

새로 만난 오형용과 김필순

견우와 직녀로 오작교에서 서로 만나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

이승에서 못다한 얘기 세세년년 나누시옵소서

하늘이 굽어 살피사

그 도척같은 민족의 원수들

하늘이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용서든 응징이든 하늘이 알아서 하시고 말고~~

하늘이 알아서 하시고 말고 ~~

       유족 오치연 님의 가족들
       유족 오치연 님의 가족들

 

 

오치연 님은 1949년생으로 세상에 나오자 여순 항쟁 사태로 부친은 형무소에 수감 된 후였다.  당시 전남 보성군 조성면 은곡리 257번지에 사시던 고 오형용 님은 1928년생으로 1살 연상의 어머니 김필순 여사와 18세와 19세에 결혼, 슬하에 아들 치연씨 하나를 두신 분으로 본관은 보성이다.

고 오형용 님은 2남 1녀 중 차남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는 가지 않고 서당에서 공부하였는데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명심보감, 사서삼경을 떼고 서당에서 조교 역할을 할 정도로 총명한 분이었다고 한다. 종가는 중농 정도 되는 부농으로 치연님의 백부가 짓던 농사를 틈틈이 도우며 앞날을 설계하는 중이었다.

사건의 경위- 고 오형용님은 당시 산림계 임시 직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공부를 하여 교사의 꿈을 꾸고 있던 차- 마을에 얼굴이 얽은 경찰 한 분이 문제집을 갖다주며 경찰공무원을 하는 것은 어떠냐는 권고를 받고 공부를 하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 여러 명이 급습하더니 오형용 님을 잡아 다짜고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정오쯤 되는 한낮으로 조부모님 이하 가족들, 치연 님을 잉태하고 있던 고 김필순 여사도 역시 이 참담한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너무 맞아 실신하면 물을 퍼다 붓고 치연 씨의 아버님을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살이 터지는 소리, 뼈 부러지는 소리 비명이 난무하고 피가 튀는 무자비한 광경이 1948년 12월 중순경에 내집 마당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지서로 연행된 며칠 후 경찰 여러 명이 다시 들이닥쳤다. 가택을 수색하겠다는 것이다. 혹시 화근이 될 것 같아 장롱에 처박았던 문제집을 발견한 경찰들은 큰 단서나 잡은 듯 난리를 쳤다. 문제집을 준 증인의 출두 명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여순 항쟁 때 교전 중 전사해 버리고 증인을 서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증인만 있었더라면 빨갱이 누명을 쓰지 않고 감옥으로 가지 않았을까? 이후 고 오형용님은 지서에서 광주 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남 기록원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승만 매국 정권이 전국의 형무소에 복역, 수감증인 재소자들이 북에서 내려오는 빨갱이들과 접선할지도 모른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모조리 학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치연 님의 아버님 고 오형용 님의 사망기일이 1950년 6월 26일, 한국전쟁 발발 바로 다음 날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대대적인 재소자 학살 때 희생되신 것으로 추정, 돌아가신 날짜로부터 2년 후에 통보받았을 뿐 시신도 찾지 못했다.

     조성국교 18회 고 오형용 님의 졸업장
     조성국교 18회 고 오형용 님의 졸업장

아들 오치연 님과 부친 고 오형용 님은 조성면 같은 조성국교 출신으로 아버지는 18회 졸업생 아드님은 38회 졸업생이다. 오치연 님이 중등교육을 마치자 종가에서는 상급학교 진학하기를 권고하며 학자금을 마련하여 주었지만 당장 호구지책이 어려워 상급학교를 포기하고 어린 나이부터 직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빨갱이 자식은 취직도 어렵다. 군대를 가도 차별 받는다. 출세는 꿈도 꾸지 마라.’ 가 주변 어른들이 일러주는 선견지명이었다. 그래서 유족 오치연 님은 중학교 졸업 후 시골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 가축도 기르는 등 서른이 되었을 때 농업으로 자수성가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재산가가 되기도 했다.

슬하에 딸을 넷이나 두셨다는 치연씨는 후에는 신발 부품 제작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기도 하였으나 말년에는 택시 운전 사업을 하시며 우리 현대사의 굴곡진 삶을 열심히 살아오셨다.

아버님을 닮아 재주가 좋으신지 음악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 실력이 전문가 수준이시라는데 분노와 억울과 증오 등의 나쁜 감정을 희석시키는 데 좋은 기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의 연주를  청해서 들어야할 것 아닌가!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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