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의 메아리

▲ 아름답게 치장한 단풍 나무 속 화도진 공원

 

유독 물기 마를 날 없이 축축하던 여름을 지나 선선한 바람 불어오는 가을을 맞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곧 무대에 오를 배우가 그 화려한 무대를 꿈꾸며 제 몸에 분칠을 하듯 나뭇잎들이 소리 없이 바쁘다. 가을의 나뭇잎을 유심히 바라본 적 있는가. 축 처진 나뭇잎은 비록 신록의 패기와 열정은 느껴지지 않지만, 듬성듬성해진 나뭇잎 사이로 축복 가득한 햇살을 듬뿍 받아 저마다 반짝인다. 가을바람에 몸을 맡기는 나뭇잎들의 움직임은 고요하듯 찬연하다. 여름날의 폭풍우를 지나며 쌓인 관록 때문인지, 그래서 가을의 낯은 충만하고 풍성하다.

가진 자의 여유 때문일까. 풍요로운 가을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나누어 준다. 잘 익은 곡식과 열매, 아름다운 단풍 절경, 그리고 가을의 낭만과 함께 즐기는 사색이라는 선물을 말이다. 가을의 문턱, 나에게도 주어진 선물 하나. 그것은 바로 사색의 즐거움이었다. 사색은 내면의 깊은 바닷속을 자유로이 유영하는 것과도 같다. 가을은 그 바다의 물결에 나의 온 마음을 내맡기고픈 욕구가 솟구치는 계절인 것이다. ‘그래. 뛰어 들어 보자!’ 내 의지가 가리킨 다이빙 포인트는 ‘훈육’이라는 곳이었다.

 

▲ 아이들과 함께 주운 가을 낙엽과 열매

 

타인과의 거리가 멀어진 만큼 가족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요즘, 몇 달 간 첫째 아이 성휘를 가정 보육하느라 나는 두 아이와 함께 작은 집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래도 염려했던 것 보다는 대부분의 시간들이 퍽 다정하고 평화로웠지만 하루 종일 아이들 옆에 있으니 아무래도 잔소리 할 일이 잦아지고, 급기야 첫째 아이를 훈육해야 할 때도 있었다. 훈육... 오랜만의 훈육이었다. 첫째 아이가 6살이 되고부터 어느 정도 육아에 요령이 붙다보니 더 이상 힘쓸 필요를 느끼지 않던 영역이었는데 웬걸, 다시 보니 전혀 새롭게 보이는 것이었다.

한동안 성휘가 걸핏하면 남 탓을 하며 불평을 하길래 처음 몇 번은 가볍게 주의만 주다가 결국 훈육의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진지하게 훈육이 무르익어 가던 중, 잠시 멈칫하고 브레이크가 걸려 버렸다. 언젠가 나도 남 탓을 하며 화를 냈던 일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내가 게으름 피우다 처리하지 못한 집안일 때문에 생긴 문제를 남편 탓하며 화를 냈던 그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거리고 마음 한 구석이 깔끄러웠다. 마음이 흔들리니 목소리에서부터 권위가 느껴지지 않고 이야기를 마치고서도 개운치 않았던 훈육. 성휘에게 했던 훈육의 말들이 고스란히 내게 되돌아와 하루 종일 귀에서 쟁쟁댔다. ‘너는 그렇게 살고 있니?’ 마음이 내게 되물었다.

 

▲ 떨어진 나뭇가지로 즐겁게 노는 남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훈육’에 대해 깊게 파고 들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훈육 방법이 올바른 것인지, 또 더 좋은 방법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두 달 동안 책과 웹 서핑을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훈육에 대한 글을 써 볼 생각도 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자니 술술 풀어지지가 않고 어딘가 엉켜있는 느낌이 들어 미루기를 반복하며 시작하지 못했다. 펜을 내려두고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훈육’의 빛깔을 띤 구슬들을 이리로 저리로 굴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저녁, ‘훈육’이라는 것이 너무 아이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의 어떠한 모습을 고치기 위해, 또는 어떠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그에 맞는 훈육 법들을 익히고 적용하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그만큼 부모가 ‘참된 부모 됨’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이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줄 부모가 정작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출 책임감을 갖지 않는다면, 또 참된 부모의 모습을 꿈꾸지 않고 그것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양분 없는 흙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길 바라는 것과도 같으며 육아를 통해 인간으로서 더욱 성숙해 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이제 생각의 방향이 나로 향하게 되었다. 아이를 생각 의자에 앉히고, 아이의 손과 발을 잡아 기를 꺾는 것과 같은 훈육 법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걸 뛰어넘는 사랑 안에서 믿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백 마디 말보다 나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워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거기서부터 바른 훈육이 시작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아로새긴다.

 

▲ 우리가 걷는 길 끝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나의 아이들이 이름의 뜻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세상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며 늘 감사함 가운데 행복한 삶을 살길 기도한다. 그렇기에 나는 세상의 빛과 소금 앞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삶 속 작은 부분들에서부터 애써 실천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부모의 발자취는 자라나는 아이들 삶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비록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오는 아이들을 잊고 살고 싶을 만큼 지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잠시 뒤를 돌아보면 어떨까. 서툰 걸음으로 꿋꿋이 내 뒤를 따라오는 아이들의 모습에 힘을 얻고 다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 그리 꿈꾸며 기대한다.

나는 오늘, 아이들에게 본이 될 만한 하루를 살았을까. 제법 쌀쌀한 바람 불어오는 가을 밤, 훈육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은진 주주통신원  juj05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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