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민중 항쟁> 75주기에 열어보는 역사의 봉분

 

유족 박형식님의 자손들
유족 박형식님의 자손들

 

밀고자의 속삭임!

 

조계산 여명에 골안개 헤치며

푸르디 푸른 트럼펫 소리 마을을 깨운다

학주가 싸게 싸게 일어나라네

고흥군 대선면 송강마을엔 명치 대학 출신, 박학주와 박은주 형제

 

갸들이 지금 일본서 귀국 했소 순사 나으리!

우리 마을은 이제

쟈들 트럼펫 소리를 못 들으문 아침이 오지 않는당께요

저녁 먹고도 농부가 어디 일이 쉬 끝납디여

아모리 늦게 자도 저 푸른 악기 소리만 들리문

귀가 떠지고 머리가 개운해지더라고

얼매나 재조가 좋은지 악기도 한 가지가 아니여

수월찬히 큰 악긴디 섹서폰이라나 섹스폰이라나

듣도보도 못한 첨 보는 악기를 소리 내는 걸 보문 차암 신기하기도 하지만 

내는 못 보요

 

피 뽑을라, 아 업고 김매기 하는 아낙들 땡삐태 대가리 터지디끼

울상이다가도 쟈들이 부는 악기 소리 들으문

피곤이 사악 간신답디여

허지만 자들이 멀쩡한 마을 청년들 빵빵허니

허파에 잔뜩 바람을 넣어부렀소

너도 나도 악기 사내라고

과부집 대동변을 내고 마을이 야단 법석이 났당께요

 

밥 세 끼 먹고 살기도 폭폭한데

양놈의 싯누런 악기 뻔쩍거리고 다니는 거 내는 못 보요

마을을 평화롭게 다스려야 하는디 자들 땜시

사분오열 나겄습디다

왜 남으 귀에 억하심정을 때려 박느냔 말요

사흘 굶은 늑대에 뜯어 멕히듯

땡삐태 잔등 타들어가고, 남들은 죽을둥 살둥 뒤넘어져 가는데

쟈들이 베짱이가 아니고 뭐냔말여

갸들이 부는 악기 소리 들리먼 내 가심에서 천불난당께요

 

갸들처럼 명치대학 못 들어갔다고

입만 벌리면 우리 부모님 그놈의 명치 명치

나는 갸들 땜시 인생 조졌소 허구헌날 명치가 아프당께요

아니 공평하게 사는 게 사회주의람서 지들만

높은 핵교 나오는 게 말이 되냔 말여

국민핵교서 내도 갸들이랑 일이등 다퉜는디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버렸당께요

순사 나으리! 한꺼번에 둘이요 둘!

쭈욱- 들이키고 다리 하나 오지게 뜯어버리시요 잉~~

하이고 또 들려, 취침 나팔인 게비네, 이런 썩을~~

*. 희생자- 47년생 박형식 님의 부친 고 박학주 님과 숙부 고 박은주 님이 희생되셨습니다. 거주지는 고흥군 대선 면 송강마을로 박학주 박은주 두 분은 형제로 일본 명치 대학을 다니시던 중 잠시 귀국하셨다고 합니다. 집안은 아주 흥하고 대가였으며 고인들은 음악에 대한 조예와 재주가 남달랐다고 합니다. 그리해서 고흥군에 악대부를 창설하셨다니 그 시대에는 쉽지 않고 참으로 흔지 않은 일을 마을을 위해 감행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고마워 하기는커녕 밀고라니요.

유족 박형식님의 친손 외손 전체 가족들
유족 박형식님의 친손 외손 전체 가족들

여순 항쟁이 끝난 후, 후기 검속 등, 청년들이 모두 빨갱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무조건 연행, 1950년 5월 30일 두 분이 지서로 끌려가셨답니다. 당시 부친은 27세, 작은아버지는 24세로 끌려가시자마자 바로 처형되셨다 합니다.

  그런데 집안을 잘 아는 같은 고을 사람이 밀고 하였다니 여기서도 이런 기막힌 일이 벌어졌답니다. 평소에 남다른 환경과 뛰어난 재주를 시기 질투하던 사람의 밀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밀고 하는 사람의 고약한 마음씨와 입장을 형상화해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고인이나 유족들께 누가 아니 될런지 고심 끝에 올려봅니다. 늘 송구한 마음을 가눌 길 없습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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