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따라 가는 거야” 89세 어머니의 인생 한 줄 평이다. 어머니의 사유에 반기를 들 수 없다. 살랑이는 가을바람,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여든여덟 해 동안 마중하고 배웅하셨다. 계절이 드나드는 자연의 섭리를 통찰하셨고 주름도 훈장이 되었다. 무심코 건네주시는 말씀 한마디가 철학자의 사유보다 더 울림있다.


■ 어느새 성큼, 여기까지

내 고향 보은 삼승은 아직도 시골마을을 벗어나지 못했고 내가 터를 이룬 안내는 내 인생의 8할을 기억하고 있다. 친정에서 흰 쌀밥 먹던 큰 애기가 열두 식구를 품는 새댁이 되어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담배농사, 참외농사, 배추농사로 근 30년, 허리가 휘었지만 모든 이치는 세월따라 가는 법이다. 세월 속에서 기억의 쓴 뿌리는 묻혀지고 그리운 추억만 남은 오늘이다. 
손끝 발끝이 쉴 날이 없었지만 이제 가을 햇살이 너무 좋은 날을 고스란히 만끽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쉼 없이 달려왔지만 이제라도 한 숨 돌릴 수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

보은 삼승에서 동대리로 시집왔을 때 내 나이 열아홉 살, 서방님은 스물두 살이었다.

얼굴한 번 못 보고 결혼한 서방님은 야속한 사람이었다. 시할머니부터 세살 짜리 시동생까지 나에게 남겨두고 강원도 인제로 군복무 한답시고 결혼한 지 열흘 만에 훌쩍 떠나버렸다. 하늘이 노래졌다. 가슴이 답답해서 울화가 치밀 사이도 없이 시동생 업고, 시누이 손잡고 걸려서 밭에 나가 텃밭을 일구었다. 담배농사 하면서 한여름 뙤약볕에 물인지 땀인지 구분도 안가는 상노동을 하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른채 하루하루 세월을 까먹고 있었다.

서방님 그리울 새도 없었다. 새벽닭이 울면 솜뭉치 같은 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 하루종일 동동걸음치면서 해가 떨어져야 겨우 허리를 폈다. 


■ 인생의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지켜주는 파수꾼들

친정에서는 흰쌀밥에 계란프라이도 간간이 먹었는데 시댁의 형편은 정말 너무 고단했다.

뒷집 언니, 명순 엄마가 그 시절 나에게 친정 언니 같은 귀인이었다. 우물가에서 만나면 눈빛만으로 인정을 보내주고 힘을 보태주었다. 빨랫터에서 방망이질 하면서 서로 다독였던 너무 고마운 사람이다. 그 언니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 구십한 살. 

우리는 한동네 살던 남정네를 만나 서로 언니 동생처럼 70년을 살고 있다. 이제 언니는 거동도 못하고 치매가 와서 며느리 수발을 받고 있지만 나에게 핏줄의 경계를 뛰어넘은 인생의 은인인 분이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내가 지치지 않게 곁을 내준 언니다. 세월 속에서 골깊은 주름으로 할머니가 되었지만 우리는 가장 곱던 시절의 우리를 서로 기억하고 있다. 발그레한 뺨이 너무 곱던 그 시절. 생각하니 눈물이 떨어질세라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나도 거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한동네 살아도 그 집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아 가끔 들러보면 동공이 풀린 언니 얼굴에 가슴이 저민다. 그 곱던 새댁들이 이제 밤새 안녕을 걱정하는 그 때를 맞았다. 서로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고 서로 가슴이 저릴 때 위로하고 좋은 일은 같이 기뻐하던 언니. 

30여년을 농사지으면서 젊은날을 보내고 그래도 땀흘린 덕에 우리 4남매 대전으로, 서울로 유학까지 보냈으니 헛수고는 아니다 싶다. 청주 사는 딸이 하루가 멀다하고 반찬을 만들어와서 같이 겸상을 하고 저녁 나절에 우리집에서 퇴근을 한다. 지난 날이 허망하지 않고 그 시절 흘린 땀이 과실이 되었다. 노년에 근심, 걱정이 없이 뜨신밥에 조기구이로 저녁 해먹고 연속극 보다가 스스로 잠이 들기를 바란다. 다음날 아침에 영감이 먼저 간 그곳으로 떠난 나를 우리 아이들이 챙겨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 안쓰러운 명찰, ‘여자’

우리 친정어머니 세대가 가장 가여운 여인들이다. 우리는 젊어서 고생했지만 나이들어 호강하는 운이 나쁘지 않은 세대다. 우리 어머니들은 내내 고생만 하다가 온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 뼈마디만 남기고 저승으로 가셨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불운이던 때, 시집 가서는 그저 시댁귀신이 되기를 작정하고 온몸이 녹초가 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어느 순간 기력이 쇠하고 노망들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속울음만 삼키는 날들을 뒤로하고 상여를 탄 채로 선산에 묻혔다. 그 시절에 비하면 우리 삶은 젊어서는 고생이 많았지만 나이들어 그래도 뼈마디 쑤시면 안마기라도 곁에 둘 수 있으니 이만하면 호강이다.

난 학교공부는 못했지만 이치에 밝은 부모님 덕분에 일머리가 좋고 살아가는 철학이 있었다. 여자는 왜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나? 늘 고민하고 우리 딸들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학까지 보내고 싶었지만 큰딸을 여상에 보내느라 둘이 부둥켜 안고 새벽닭이 울 때까지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딸들 공부 많이 시키는 건 오히려 집안 망하는 길이라는 남편의 일침이 바로 법이 되는 어이없는 그 시절을 지나왔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우리 큰 딸이 은행에 취직해서 살림밑천이 되면서 동생들 공부시키고 부모가 할 일을 해준 덕에 내 몫이 줄어들어 한시름 놓을 수 있던 건 부인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은행에서 사위를 만나 지금은 마나님 소리 들으면서 사는 우리 딸을 보면 내 인생을 보상받는 시절 같다.


■ 지금이 호시절이다

89살, 먼저 간 집안 어른들의 상여 뒤를 따르며 통곡도 해보았고 내 설움에 울기도 많이 울어보았다. 내 새끼보다 시동생, 시누이 먼저 돌보느라 정작 내 새끼는 뒷전인 시절도 건너왔다. 고단했지만 나만 겪는 풍상이 아니었기에 참고 세월 속에서 묻어두고 지나왔다.

우리는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로 위로 받으면서 이렇게 잠깐이라도 호강하다가 먼 여행 떠날 수 있으나 우리 어머니 세대를 생각하면 한숨과 눈물밖에 안 나온다. 인생은 어차피 다 지나가는 것, 폭풍우 몰아치던 바다도 어느새 잔잔해져 고요하다.

이제 딸들이 단풍놀이 가자고 매일 채근할 때가 왔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지만 나는 너무 행복하다. 큰딸이 운전하고 작은딸이 맛있는 송어회를 사고 나는 창문 열고 바람만 맞으면 된다. 그리고 딸들과 사진 속에서 환한 미소 한번 지어주면 엄마 노릇이 끝나는 이런 호시절이 나에게도 왔다. 그저 아우성 안치고 세월따라 왔더니 그 세월이 나를 여기에 데려다 주었다. 자연의 이치와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무지한 것이 아니라 가장 현명한 처신이라는 생각에 방점을 찍는다. 

<아들의 편지>

은퇴하고 좋은 것이 많지만 어머니를 자주 뵐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머니 모시고 대청댐을 돌고 맛있는 회를 같이 먹고 어머니와 한 지붕 아래서 잠드는 요즘이 행복합니다. 저는 요즘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저 중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담배농사를 한창 하셨어요. 뜨거운 여름날 심부름 하는 거 싫어서 일부러 공부만 했는데 어머니는 제 마음 아시면서 제 수고까지 짊어지셨습니다. 그때 아들 노릇 못한거 이제 조금씩 갚으려하지만 어머니가 주신 사랑에는 부족하고 또 부족합니다.

어머니, 기력이 떨어진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지금처럼 그저 곁에만 계셔주세요. 사랑합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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