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1944~) 청성면

노익장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인생의 겨울을 만났다. 엊그제 중학교 동창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면서 쓸쓸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65년 내내 친하게 지내던 동무들 8명이 모두 세상을 등졌다. 지금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사는 내내 인생에 의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살아왔지만 명쾌한 정답을 내려본 적이 없다. 그저 순리에 맡길 뿐.

■ 마을이 수장되고, ‘김서방’들은 다 떠났다

충주댐 수몰지구에 잠겨버린 유년의 기억은 코흘리개 다섯 살 꼬마 ‘김기태’가 전부다. 수몰되기 한참 전에 우리는 마음을 떠나왔다. 수몰후에는 ‘김서방’들이 다 떠난 자리에 청풍호수가 들어앉았다. 

고향 사람들은 달리 실향민이 아니라 졸지에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수몰지구에 추억이 고스란히 묻힌 분들은 물 빠지면 가을의 플라타너스 나무가 단풍잎을 흔들것 같은 생각에 다들 고향을 그리워 할 것이다. 

유년시절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의 형편이었다. 아버지는 해방되기전에 징용을 가셨다. 북해도 탄광에서 노역하셨다가 해방되면서 바로 나오셨다. 1920년생인 아버님은 인삼 담배 농사를 하셨다. 한여름 뙤약볕에 수확하느라, 힘들기로 따진다면 담배농사를 따라갈 농사가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담배농사하는 집에는 딸 내미 시집을 보내지 말라고 했을까만은...그래도 환금성이 좋은 작물이라 농사는 고단했지만 먹고사는 방편으로 그만한 작물이 드물었다.

청성에 13대조 할아버지 묘가 있어서 우리 일가친척들은 청성으로 나와 내내 살았고 지금은 명을 달리하신분들이 많아 김씨들 흔적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유년시절 작은아버지와 형들 따라 다니면서 “아메리카차이나타운”을 흥얼거리던 기억이 어렴픗하다. 우리 자랄 때는 보통 7남매 8남매가 예사로워서 작은 아버지들과 형님들 나이가 비슷했고 나 또한 조카들과도 불과 예닐곱 살 차이라 다들 형제처럼 성장하는 웃지 못할 추억들을 갖고 있다. 

다들 한 할아버지 자식들이라 앞집 뒷집에 살면서 서로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고 한겨울 한파가 불어닥치는 날이면 아랫목 구들장에 불을 지피고 사촌들이 모여 같이 한 이불을 덮었다.

한 녀석이 방귀 한 번 뀌고 이불을 들추면 다들 코를 잡고 난리를 쳤다. 지금 아이들은 추운 겨울날의 그런 정취를 전혀 알 수 없고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케케묵은 70년 전 이야기지만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는 돌이켜보면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일상은 고단했지만 사람 사는 거 같았으니까...


■ 빛바랜 동화 속의 한 장면, 천막교실

나의 학창 시절은 6.25 직후라 뭐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고 풍족하지 못했다.  성한 동네가 없어서 우리가 공부하는 교실 또한 폭탄 맞은 자리처럼 엉성했다. 학교에 교실이 없어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천막 교실에서 백묵 가루 날리는 칠판 하나 걸어두고 옹기종기 앉아 abcd를 배워나갔다. 전쟁 세대들의 상흔이며 아득한 그리움이 됐다.

점심시간에는 어머니께서 학교 담장근처에서 “기태야” 불러주시면 담 너머로 어머니가 건네주시는 도시락을 받았다. 직접 뜨신밥을 갖고 오셔서 점심시간에도 어머니의 정을 고스란히 받고 성장했다. 고생 많으셨던 어머니는 곁에 안계시지만 그 사랑은 지금 내가 하얀머리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잊지 못한다. 그립고 또 그리운 어머니. 빳빳한 광목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동분서주하면서 살림하랴 농사지으랴 하루도 쉴 틈이 없던 어머니. 가족에게 온몸을 헌신하면서 살아온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자화상이었다.

나무그늘 아래 칠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공부하는 까까머리 중학생들. 어머니가 담장 너머 건네주시는 뜨신밥, 어쩌면 빛바랜 동화책 속의 한 장면처럼 정겹지만 전쟁 이후 성장세대인 우리가 살아내온 흔적들이다. 그 이후도 보릿고개며 산업화의 급물살을 타면서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맞으며 여기까지 도착한 세대이다. 지나고 보면 잠깐, 어느새 여기까지 왔을까 의문을 던져보면 그저 순리에 따르며 여기까지 왔다는 말 외에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없다.


■ 공직 34년, 치열하기 보다 알곡을 남기다  

옥천중학교를 다니면서 반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이었다. 제법 공부를 잘해서 청주로 유학을 갔다. 고모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제대 후에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고모 집에서 유숙할 때는 아버지가 한 달 한 번씩 쌀 한가마니와 먹거리를 한 짐씩 들고 오셨고 나도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공부에 매진했다. 여름이면 방석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사력을 다해 공부했다. 그때는 육군사관학교가 목표였다. 군인이 되고픈 마음도 간절해서 육사에 지원했지만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성적이 모자라서 낙방했다면 깨끗이 단념했을텐데 고배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연좌제에 걸려 낙방하게 되었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8촌의 월북으로 연좌제에 걸리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의 쓴맛을 통렬히 맛보았다. 물론 시대상으로 예민한 상황이지만 불합리한 제도가 억울한 사람을 양산하는 일들은 우리가 살면서 통과의례처럼 지나는 것이다. 


제대하고 교육행정직 시험 준비를 하다가 인생의 큰 고비를 또 만났다. 인생이 장밋빛 탄탄대로만 밟을 수 없다는 진짜 진리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3월1일이 시험인데 1월 29일 날 교통사고가 났다. 머리를 다쳐서 22일 동안 병원 신세를 졌고 사고 후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경계에 서 있던 때다. 다행히 회복하고 그 이듬해 공직에 입문할 수 있었다. 

사회 초년생이 큰 홍역을 치르고 공직에 입문한 만큼 두배의 책임감으로 공직에 임하게 되었다. 다양한 부서를 다 거쳤지만 1984년 시작된 모자보건센터에서 1년 근무하는 동안 198명의 출산이 있었는데 오래 기억에 남는 부서였다. 고향에 면장으로 가게 되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쁨을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고향마을에 면장으로 가는 건 공무원들에게 영광스러운 자리라 나또한 뿌듯하고 취임 전날은 가슴이 설레어 잠을 설치기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공직자로서의 신조는 ‘원칙은 넘볼 수 없는 가치, 민원은 쉽고, 정확히, 빨리를 원칙으로! 신념이 있다면 ‘불가(不可)도 바로, 가(可)도 바로’ 원칙은 지키되, 유연한 사고를 놓지 않았다. 30년 넘는 공직생활이 인화와 성실이 근간이었다면 퇴직 후 인생 2막의 삶은 조금 더 따뜻한 세상에 점 하나 찍는 인생이고 싶었다. 

그리운 부모님
그리운 부모님

 

■ 은퇴 후 20년, 주부로 살다

공직생활의 시작은 삶의 방편이었고 일하면서 보람을 얻게 되었지만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꿈들을 제대로 펼치기에는 무리수가 많았다. 헌신한 아내를 위해 가사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은퇴 후 식사와 빨래 등을 내가 맡아서 전업주부로 다시 이름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짐작하고 아내를 돕는 정도로 시작했지만 가사를 노동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부들은 그 노동을 스무 살 넘어 생을 마감할 때 까지 하고 있다. 남자들의 일은 누적되어 결과물을 만들지만 가사는 매일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누적되지 않고 하루라도 게을러지면 바로 밑천이 드러나는 고행같은 일이다.

그래서 그 가사에서 아내를 해방시켜주었다. 재주가 일천하여 잘하지는 못하나 아내가 행복해하고 나또한 즐겁다. 동갑내기 아내와 나는 이제 80이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고 둘 다 허리디스크라는 불청객과 함께 동거한지 10여 년이라 살살 우리 먹고 사는데 지장없을 만큼 힘을 쓰고 있다. 아내는 허리디스크로 수십 년째 고생이다. 식구들 건사하느라 몸이 담보잡힌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제 ‘동지’가 되어 하루하루 상부상조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내일 아침 메뉴를 준비한다. 황태콩나물국으로 결정하고 오늘 하루의 숙제를 마쳤다. 아내의 고생에 보답하려면 여생을 다 쏟아부어도 안되지만 그저 내가 아내보다 조금 더 건강하게 내내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다. 월동 준비도 시작할 때, 올해 월동준비는 청주 큰 딸 집에서 우리 부부 겨울을 나고 오는 것이다. 허리 디스크가 심해진 우리 부부를 배려한 딸의 선물이 그저 고맙고 미안하다. 내 인생의 남은 겨울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아내와 같이 설계도를 그려봐야 겠다. 그 숙제가 쓸쓸하지 않은건 지나온 시간이 자존심에 흠집날 일이 없다는 반증이다. 이만하면 족하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만큼의 후회는 인생의 감초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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