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1944년 이대식

‘’나도 실향민이오, 우리 이서방들이 거의 다 떠나왔지“

이대식면장님의 첫 마디였다. 고향을 북에 두고 온 분들만 실향민이 아니라 당신도 실향민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신다. 유년의 추억이 묻힌 고향마을이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눈에 선하다는 말을 떠올리시며 촉촉해진 눈에 고향 마을, 그리고 그 어머니, 아버지, 친구들까지 들어앉았다. 엊그제 모래사장에서 뛰어놀던 작은 남자아이가 여든 살 이라는 나이로 쏜살같이 달리고 있다. 

어느새 흰머리가 가득하지만 살아온 지난날들이 부끄럽지 않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옅은 웃음으로 화답하셨다. 허나,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잘 살아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시며 “같이 고민해봐야 할 숙제네요” 라고 따로 언급하신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시골소년 큰물로 나와 헤엄치다

9남매의 막내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큰 형님이 돌봐주던 일곱 살 꼬마 대식이는 삼양리 외갓집으로 나와 삼양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나마 문명이 유입되는 곳에서 숨통을 트기 시작했다.
가나다라도 유창했고 받아쓰기는 항상 동그라미였던 아이, 덧셈 뺄셈도 친구들 보다 훨씬 빠르게 익혀나갔다. 어머니의 총명함을 닮았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으셨지만 셈이 빠르고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어머니가 다 처리하셨다.
 

어머니의 결정은 항상 옳았다. 그런 어머니를 닮아 유년 시절의 나는 제법 영리한 아이로 주목받았다.

나를 영리하게 본 외삼촌이 청주 연초제조차장에 근무하던 외갓집 형님한테 보내주셨다. 형님은 총무처 화공직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시고 청주 연초제조창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그 당시 형님은 나에게 영웅 같은 분이었다.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라는 외삼촌의 선처였는데 어머니를 멀리 두고 청주 가서 공부한다는 것이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큰물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 욕구는 감출 수 없었다.


명문 청주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공부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복병을 만났다. 늑막염이 와서 내내 고생하느라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1년을 쉬고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슴에 품었던 대학 진학을 잠시 유보하게 되었다.

 

■ 늑막염으로 좌절된 대입, 새로운 이정표

회복하고 다시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우리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펼쳐지지 않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갖고 있을 때 교육 행정직 시험 공고가 떴다. 노느니 시험이나 볼까 하며 몇 달 준비하고 시험을 봤는데 덜컥 합격을 하고 말았다.

공무원으로 첫 발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서울로의 진학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당장 맡겨진 업무를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대학진학은 유보에서 중단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군대 영장이 나오고 경기도 연천 5사단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한창 기합과 구타가 심하던 때인데 하루 이틀도 아닌 시간을 억울하게 보낼 수가 없었다. 내가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선임하사한테 달려들었다. 나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의 막내라 내가 돌볼 사람이 없어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선임들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고 군 생활에 적응을 잘했다.

아마 시한폭탄 같은 놈 건드려야 좋을 거 없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군대의 그 악습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 내 인생의 9할인 아내, 삶의 의미는 아내로부터 

제대 후에 **면사무소로 발령을 받고 지방공무원으로 행보를 시작했다. 주민들과 더불어 마을 일을 해나가는 과정이 체질에 맞아서 서울로 대학가는 길은 아예 포기했다. 유보에서 포기로 바뀌었다. 옥천의 작은 동네 공무원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청주고 동창들이 일류대를 나와서 잘나가는 행보를 보이면 내심 주눅이 들었던 것은 숨길 수 없다. 나도 그들만큼 공부를 잘했는데 늑막염으로 너무 고생한 후유증이 내 인생의 궤도를 바꾸어 놓았다. 

큰 도시에 나가 제대로 폼나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을 잠재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한여름의 폭염처럼 펄펄 끓는 마음을 잠재워준 여인이 바로 아내였다. 아내를 만나면서 소박한 삶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었다.

아내는 면사무소에서 만났다. 나는 스물여섯 살, 아내는 스물두 살, 시골 처녀 총각이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처음부터 눈에 들어 온 아가씨는 아니었다. 늘 조근조근한 말투로 수줍음 많이 타는 사환이었는데 심성 고운 모습들이 눈에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료와 둘이 숙직을 서는 날이었다. 아내가 저녁 야식거리를 준비해서 면사무소 숙직실로 가져왔다. 만두를 직접 찌고 쑥떡, 동치미를 도시락에 담아왔는데 먹기도 아까운 그 정성에 탄복했다. 아내는 야식 도시락으로 나에 대한 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나는 그런 아내가 너무 고마웠다.

호기롭게 프로포즈하고 싶었지만 눈치만 보고 있던 차에 아내가 도시락을 준비해줘서 나는 감사인사를 하겠다고 근사한 대접을 하고 싶다면서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청주 유명한 식당에서 불고기를 사줬는데 촌사람이 폼 잡느라 돈도 쓰고 며칠 마음도 졸였다. 

우리는 1년여 간 연애하고 작은 마을의 부부 공무원으로 청춘을 시작했다. 작고 초라해보였던 우리의 50년 전 신혼생활, 방 한 칸에 부엌 딸린 방, 아궁이에 솥단지를 올려놓고 소꿉장난처럼 신혼을 시작했다. 워낙에 박봉이라 아내는 늘 내가 입다 버린 축 처진 메리야스를 입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아내의 뽀얀 얼굴이 어느 날부터 기미가 잔뜩 올라와 내내 속을 끓이던 날들도 부지기수였다. 둘이 월급 16만원으로 우리 4남매와 여섯 식구가 어떻게 살았나 산술적인 계산으로도 답이 안 나온다. 결국 아내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저축을 하고 우리는 살림 불려나가는 재미를 톡톡히 맛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내는 새 옷 한 번 제대로 입어본적이 없었다. 우리 막내 녀석은 누나들 옷을 물려 입고 자랐는데 불평 한 번 안 한 막내가 기특하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영감 같은 녀석의 속을 모를 때도 있었다. 부부 한의사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 대단하고 우리 가족의 자랑이기도 하다. 

■은퇴 후 지난 시간을 보상받고 누리는 날들 

서울로 간 친구들은 대기업에 다니며 떵떵거리고 사업으로 승승장구 하던 시절 나는 시골의 공무원 부부로 초라하게 살았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은 대역전극이라고 할 만큼 달라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근면하고 정직하게 하루하루 35년을 살아왔더니 우리 부부 탈 없이 퇴직을 하고 지금은 나이 들어 부족한 것 없이 여유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근육이 연금이라고 우리 아이들이 누누이 말하는데 우리 부부 하루 만보씩 걸으면서 몸 근육도 단단하고 나라에서 주는 연금까지 근육이 빵빵한 노인네들이다.

살다보니 이런 호사를 누리는 때가 온다. 참고 견딘 날들의 보상이다. 허나, 늘 좋을 수만은 없어 지금 아내는 아니 우리 부부는, 커다란 숙제 앞에서 고민 중이다. 나도 덩달아 같은 고민을 안게 되었다. 청주 사는 막내며느리가 한의사인데 두 달 전부터 아내가 육아를 맡고 있다. 남의 손에 손주 맡기고 싶지 않다는 아내의 결정인데 나까지 덩달아 육아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내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했고 혼자서 육아하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커서 내가 손을 보태야만 한다. 아이들도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려는데 아내가 극구 고집을 부리니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가족 애착이 특별한 아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지금 우리 부부는 졸지에 청주에서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고 있다. 1년만이라고 기한을 두었지만 과연 가능할까?

우리 인생은 늘 숙제를 안고 살아간다. 손주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힘든 아내를 생각하면 못할 짓이다. 때 아닌 복병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요즘 결혼안하는 청춘들, 아이 안 낳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혹자는 나보고 행복한 비명이라고 하는데 이 비명은 절대 행복하지 않다. 각자의 삶의 조건이 달라서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규정지을 수는 없다.

우리 인생에 복병은 늘 쳐들어보고 숙제는 또 주어진다.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듯이 풀어가는 재미가 쌓이면 그 인생을 다른 말로 ‘풍요롭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손주 육아에 힘은 들지만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니 또 그것으로 족하다. 손주 녀석의 방긋 웃는 모습에 사실은 힘든 것도 잊게 된다. 우리 부부는 이미 다시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아보자 서로 눈빛으로 주고받았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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