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태(1936~)

깊은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는 비바람에도 요동치치 않고 한결같이 곁을 내준다. 그리고 내내 기억된다. 박한약방, 65년이 넘은 그 터에 깊게 뿌리내린 약방과 원장님은 닮아 있었다. 65년 세월은 한약방 외벽에도 고스란히 담겼지만 세월의 흔적은 오히려 품위 있었다. 결이 거친 현관문을 열자 뜻밖의 낯선 장면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원장님과 사모님 두 분이 마늘을 까고 계신 모습이 마치 정겨운 수채화가 그려진 화첩을 넘기듯이 푸근했다. 원장님 부부는 청주 한약방과 사모님이 옥천의 여학교에 교사로 근무하셨던 추억을 못잊어 이원의 작은 시골집을 오가시며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박홍태(1936~)
박홍태(1936~)


■ 13살에 서울에서 피란와서 정주지(定住地)가 된 청주의 일꾼으로 60여 년


박한약방, 65년이 넘은 터에 길고 단단하게 자리했다. 선친으로부터 시작된 한약방의 길도 작정하고 들어선 길이 아니었다. 상경대 출신이지만 한약을 공부하고 아버님이 한약방을 하고 계셔서 도와주는 역할을 시작으로 가업을 잇게 되었다. 

이미 은퇴한 나이라 한 달에 한두 번 멀리서 나를 찾아오는 분들에게만 한약재를 드리고 있다. 6. 25전에 서울 종로에 살다가 피란 내려와서 청주에서 정착했으니 70년 전부터 청주에 뿌리를 내렸다. 아버님은 충북사범 졸업생이며 교사 출신인데 정치현장에도 계셨던 분이다. 김구 선생님과 뜻을 같이했고 남북협상 할 때 젊은 나이로 참석하기도 하셨다. 아버님이 내수초등학교 훈도를 하시다가 한약업을 하셨다. 이 터에서 65년의 시간이 지났다. 

선친의 전철을 밟기라도 하듯 나도 전공분야외에 다른 길에 들어섰지만 또 그 길에서 일각을 이룬건 유서깊은 가풍의 면모일 것이다. 처음 한약방 개원했을 때의 여건은 의료의 불모지에 파종하면서 지역의 일꾼으로 첫발을 떼었다. 한약방 초창기 때 아버님과 자별하시던 지역 유지 분이  “여봐 박군, 자네 이제 사회 활동도 해야겠네” 하시며 나를 지역일꾼으로 초대하셨다. 

내 나이 33살. 내가 운좋게 동년배들보다는 배움이나 활동의 폭이 넓어 지역에 봉사하자고 활동을 권하셨다. 뜻하지 않게 문화원에서 요직을 맡게 되었다. 내 나이 불과 서른세 살이었다. 지역 활동을 시작한 첫 번째 행보였고 작정한 자리가 아니었지만 이후로 문화원 요직을 10년 동안 했다. 돌아보면 상경대 출신, 다시 한약방, 문화원 활동, 전혀 무관한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선거관리 위원회 부위원장을 20년이나 했다. 판사가 위원장을 맡던 때였음에도 나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지역에서 감투란 감투는 다 쓰면서 종횡무진 활약하던 시절이다. 공화당 때 문화원 활동당시 전화 한 통을 받고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도의원을 권하는 메시지였는데 아버님이 정치 운동하셨던 분이라 조심스럽게 상의를 드렸다. 아버님은 거두절미 “정치하려면 장가도 들지말고 혼자 해라” 한마디에 모든 의미가 담겼다. 이튿날 전화걸어서 고언은 받았지만 내 갈 길이 아니다 라고 회신을 보내며 나는 지역에 남게 되었다. 

법무부보호관찰위원도 오랜기간 맡았는데 비행청소년들을 보호, 선도하여 지역사회범죄예방활동에 기여하도록 독려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법무부보호관찰위원은 자격기준과 선정절차가 매우 까다로워서 그 역할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활동은 무보수로 순수한 봉사이지만 내 주변 청소년들을 바르게 성장하도록 선도 교화한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허투루 할 수 없는 역할이었다. 아이들의 근황을 1주일에 한번씩 보고하는 일이 자칫 번거로운 일일수도 있지만 아이들이 교화되어 세상에 나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잘 성장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약방을 하면서 문화원활동부터 지역사회 곳곳에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던것은 모든 나의 활동에 아내의 내조가 큰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명한 아내 덕분에 지역에 많은 봉사를 할 수 있었다. 아내는 옥천여고 교사였는데 우리 형님이 학교에 계셔서 자연스럽게 중매가 이루어지고 마치 인생의 수순처럼 물흐릇이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내내 내 곁을 지키며 아름다운 동반자가 되어준 우리 아내가 나에게는 그저 귀인이며 숭고한 인연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의 든든한 동반자인 아내는 내 인생의 8할이다. 간간이 산책길에 아카시아 꽃을 가져다 아내 손에 들려주기도 하고 아내 생일에도 꽃 선물을 하던 로맨티스트의 면모도 있었다.

 

■ 이젠 익숙한 수식어 ‘최고령’

작년 말까지 15년 동안 색소폰 동호회장을 역임하고 지역 행사에 연주 봉사를 꾸준히 해왔다. 색소폰도 최고령자라 후배에게 회장을 맡겼고 헬스클럽에서도 나는 최고령자다. 87세, 어느 틈에 여기까지 왔는지... 우리 부부가 80대의 나이에도 건강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건 천운이 아닐까 싶다.

지난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날들이 모였을텐데 엊그제 같다. 모두 아름다운 날들일 수 없듯이 나에게도 시련과 아픔은 당연한 인생의 부산물이었다. 한때는 한약방에 환자분들이 밀려들어 용한 한약방으로 인정받고 그에 따른 수입도 적지 않아 부와 명예도 같이 가져보았다. 인생을 살면서 나만큼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세상에 공짜가 없어서 나도 금전적으로도 큰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환자가 불상사를 겪어 마음 고생을 하기도 했다

중요한 건 모두 나에게 유책 사유가 없는 일임에도 우리는 살면서 통과의례처럼 억울한 일에 연루되기도 하고 또 내가 옳다면 ‘진실’은 반드시 우리 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닥친 상황에 매사에 긍정적으로 임하는 자세다. 우리 인생이 호락호락하지도 않지만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더더욱 없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인생의 숙제를 하나씩 풀어갈 때 답도 빨리 구할 수 있다. 모든 영역에서 최고령이듯이 처음 시작도 내가 이름을 올린 것들이 많았다. 

로타리 활동할 때 총재님이 “박 원장, 우리 회원들 골프좀 가르치지” 하시는 말씀받고 20명 회원 모집해서 연습장을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골프장이 없어서 여주로 가던 시절이라 청주 골프역사의 테잎을 끊은 것이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골프만큼 잘 알려주는 스포츠도 없다.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들자면, 40년간 골프치면서 홀인원이 쉽지 않았는데 골프에 전혀 관심없던 친구 머리 얹어 주려고 골프장에 데려간 첫날 그 친구가 홀인원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작정하고 홀인원을 한 것이 아니라 산으로 가던 공이 돌돌구르더니 홀에 들어가 버렸다. 그 날의 결과는 전적으로 ‘운’이었다. 골프를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듯이 인생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물을 만나기도 하고 뜻한바를 이루기도 한다. 

나는 골프원조였지만 15년 전부터 골프를 놓았다. 이제 어디가나 최고령이라는 수식어가 나를 따라다녀서 같이 칠 사람도 하나둘 사라지면서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골프채를 놓게 되었다. 

 


■ 낡은 함석집으로부터 박 한약방까지 

박한약방의 60여 년을 돌아보니 피란길의 소년으로부터 시작됐다. 6.25때 피란 내려와서 셋방살이로 시작했는데 땅 주인이 아버님과 자별(自別)하셔서 “여보 박선생, 이 집 줄게 외상으로 쓰시오” 그렇게 집을 외상으로 사서 정주의 터를 닦기 시작했다. 낡은 함석집이었지만 우리 식구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었다. 그 마음에 보은이라도 하듯이 우리 가족들은 더 열심히 살아냈다. 어려운 시절에 그 말 한마디가 가족을 살리고 사회의 한 축을 세우는 역할로 이어졌다.

이후 옆으로 옮겨서 지금 한약방을 시작하고 내내 여기서 터지킴이가 되었다. 한약방도 빛바랜 외벽이 나와 인생을 같이했다. 비바람 불고 눈보라도 맞았지만 따뜻한 햇살은 반드시 우리 곁을 지켰다. 한약방은 그렇게 60여년의 시간이 쌓였다. 우리 부부가 결혼할 때 내가 늦은 결혼이라 친구들이 아이를 안고 하객으로 참석했다. 

그때 신랑 우인으로 참석했던 12명의 동창들이 다들 먼저 먼 길 떠나버렸다. 이제 촌음을 다툴 일도 없고 하루하루 무탈한 일상을 보내면서 주어진 나의 인생 여정을 걸어가면 된다. 내 삶을 허투루 재단하지 않았고 큰 욕심이 없었듯이 사무치는 후회도 없다. 중국의 철학자 지센인이 수상록에서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라고 인생을 말했듯이 나의 87년도 다 지나가고 조용한 안식의 때를 만났다. 지난 87년의 시간보다 아내와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 보내는 요즘의 ‘하루’가 더 소중하다고 말한들 흠잡힐 일이 없다. 이제 나를 찾는 전화벨소리도 하루에 한두 통, 세상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이 정적이 그저 평안하고 호흡을 고르게 한다. 

 

<막내아들 편지>

아버지, 생각해보니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께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께 띄우는 편지는 학교숙제로도 몇 번 써보았지만 아버지께 쓰는 편지는 처음이라 떨리고 설렙니다.

“우리 막내 아들은 건달이에요“ 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뵐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형, 누나들처럼 공부에 매진해서 사회에서 박수받는 그 길을 걷지 못한 저에 대한 반성과 사업하는 아들을 자유롭게 인정해주시고 제 일에 날개를 달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감사입니다.

유년시절에는 우리 아버지는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하실까라는 생각만 했지, 아버지의 행보가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주는 지 몰랐습니다. 이제 친구분들도 먼저 떠나시고 일선에서 모든 활동을 내려놓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초라하거나 안쓰럽지 않은 건 어머니와 해로 하시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도 훌륭하셨고 지금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저희들에게 영웅이십니다. 
오래오래  어머니와 함께 저희와 함께 해주세요.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기사는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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