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주기에 열어보는 역사의 봉분>- 희생자 고 배형호님 사연 !

                                   왼쪽부터 배형호님과 동생 배형기님(출처 : 고 배형호 유족 김원희 님 제공)
                                   왼쪽부터 배형호님과 동생 배형기님(출처 : 고 배형호 유족 김원희 님 제공)

 

에고에고 아버니임~~ 팔자를 고치라니요

제 팔자 사나워

꽃다운 나이 남편을 비명에 가게 한 것도 모지라는디

지가 뭔 낯짝 있어 팔자를 고친다요

아니 되오 아니 되오

하늘이 알고 땅이 알디끼

누가 뭔 죄를 지어

우리 부부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 놓는다요

저 아아들은 뭔 죄가 있어

애비도 잃고

애미마자 없는 세월 어찌 살라고

시커먼 놈에게 들어가라니요

능욕의 세월은 한번이문 족하지

아니 되오 아니 되오

네 살짜리 영순이와 젖먹이를 놔두구 가긴 어딜 갑디여

남편이 내 옆에 없응께

내 편이 가버리고낭께

암흑이 넘보고 어둠이 나를 찍어누르네

 

영순아 내는 간다 애미가 간다

내가 가고 나면 저 두 살짜리 의성이를 누가 돌본다요

갯지렁마자 타죽는 염천이 되면

영순아이- 의성아이-

느구들하구 나허구 부둥켜 안구 냇물에 멱감으며 시름 달래구

불타던 만성리 구덩이에서

여수 건너 바다 건너

네 애비 뜨겁다고 소리치는 밤

거문도 밤바다가 원혼들로 아우성치면

하늘에서 별싸라기 내리는 모래밭에 느구나구 부둥켜 안구

실컷 통곡이라도 하다 보면

세월은 타고 앉은 말처럼 줄행랑을 놓겄지요

그런데 아버니임~ 팔자를 고치라니요

 

네 살짜리 영순과 젖먹이를 놔두구 가긴 어딜 갑디여

내는 못가네 내는 못가네

내 사랑 피붙이 놔두고 어디 가서 살아질까

애비 애미도 없는 애들

친척집을 전전하며 유리걸식헐 것이 뻔하고 뻔한디

팔자를 고치라니

놈들의 원수를 갚지도 못했는데 팔자를 고치라니요

 

일제 36년에 배운 것이 고문이드냐

고문이라는

고상한 이름의 생체실험을 행한 자들이여!

학살 명령자는 나오라

내 서방 가슴에 총알을 박은자 누구요

만성리 구덩이에

내 사랑 청청한 육신에 석유 뿌리고 지옥 불을 붙인 자는 누구요?

유족  김원희 님이 국회 앞에서 <여순항쟁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피켓팅하는 모습(출처 : 유족 김원희 님 제공)
유족  김원희 님이 국회 앞에서 <여순항쟁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피켓팅하는 모습(출처 : 유족 김원희 님 제공)

 

 

 

 

 

 

 

 

 

 

 

 

 

 

 

유족 김원희 씨 댁 사연

희생자 - 외조부 고 배형호 님.

고 배형호 님은 당시 27세로 1922년생이셨다. 거문도 분으로 본관은 성주이시다. 당시 우체국 직원으로 미래에 우체국장을 바라보는 유망주이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문도 서도리에서 사시던 중 같은 마을에 살던 처자와 연을 맺고 슬하에 원희씨의 어머니 배영순님과 남동생 배의성 님을 슬하에 두셨다. 어머니 배영순 님은 당시 3살이었으며, 48년 8월 8일에 태어난 남동생이 겨우 백일을 넘길 때였다.

 

사건의 경위 - 1948년 10.19일 여순항쟁이 시작되고 같은 달 27일에는 저항세력과 군경의 대치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되는 시점이었으나 부역자를 잡아들인다는 명분이 시작되었다. <두만강호> 라는 함선이 거문도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48년 11월 초였다. 여수가 불바다가 되고 순천, 구례, 곡성 등지에서 일어났던 공권력의 무자비함을 전해 듣던 때! 마을 주민들 중 젊은 청장년들은 대부분 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두만강호의 함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수하면 살려주겠다. 속히 자수하라!”

 

대부분 20대 청년이었다. 그 말을 믿고 속속 하산하자 1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은 포승에 묶여 여수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유도 없었다. 무슨 연유로 잡아들이는지도 몰랐다. 당시 거문도 인구는 2,000여명. 우리나라 전 인구 문맹률이 90프로 이상일 때 거문도에는 비교적 배운 사람, 상급학교에 다닌 분들이 많았다는데 그것이 이유일까???.

 

훗날 <호남계엄지구사령부>의 기록물을 발견, 다음과 같은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행된 청년들은 여수 경찰서에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48년 11월 21일, 고 배형호님은 사형 선고라는 청천벽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함께 연행되었던 형호 님의 남동생 형기님은 무기징역으로 판결이 났던 것이다. 훗날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어 형기씨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재소자 학살 때, 1950년 7월 초에 처형되시고 형님 배형호님은 49년 1월 15일 지금 형제묘가 있는 만성리에서 형이 집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시신은 찾았느냐?

 

후에 <진화위>의 활약으로 현지주민들로부터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현재 형제묘가 있는 만성리 한 지점에는 큰 구덩이가 마련되었다. 군경들은 구덩이 앞에 다섯 사람씩 포승에 묶인 죄수 아닌 죄수들을 나란히 세운다. 그리고는 저격수들이 총을 난사한다. 총을 맞은 사람들이 구덩이로 떨어지면 그 위에 기름을 뿌렸다. 그리고 다시 다섯 명이 총살되고 또 기름이 부어지고 그렇게 해서 끌고 갔던 배형호 님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다 총살을 당하여 구덩이에 떨어지고 나니 그들은 천길 시커먼 지옥에 불을 붙였다.

 

억울한 시신들은 몇 날 며칠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탔을까??? 증거 인멸이다. 능욕의 세월에 불을 붙인들 역사를 인멸할 수 있을까??? 기억을 태울 수 있을까??? 하늘의 눈에 불을 지른 사람들, 아직 살아남은 자들, 평생을 양심이라는 지옥불에 기억을 끄슬리며 어디에 살아가고 있을까???

       배형호 님 결혼식 사진(출처 : 고 배형호 유족 김원희 님 제공))
       배형호 님 결혼식 사진(출처 : 고 배형호 유족 김원희 님 제공))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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